위기가 와도 시체처럼

어디에 실리는 것인지는 나도 정확히는 모르고

어찌되건 나는 저작권 무시하고 뿌린다.

주석은 꼭 필요한 부분 빼고 다 지웠다

 

 

*

<위기가 와도 시체처럼>

-힙합과 문학의 평행을 껴안기

 

46

반갑습니다. 이메일 인터뷰라는 형식으로 만나게 되어, 그것도 ‘한국힙합’과 ‘한국문학’이라는 주제로 만나게 되어 더욱 그렇습니다. ‘힙알못’이면서 비공식적 ‘쇼미충’인 저로서는 설레기도, 동시에 걱정이 되기도 합니다만 하나씩 이야기를 하다보면 이 감정의 정체가 어떤 식으로든 분명해질 거라 믿으며 인터뷰를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본격적으로 질문하기에 앞서 ‘한국힙합’이라는 주제가 어떤 맥락 속에서 선정되었는지, 혹은, 이 주제가 소환되어야했던 긴급한 필요성 같은 것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인터뷰를 시작했으면 좋겠습니다.

 

90

음 힙합이라는 주제는 제가 아니라 46님이 먼저 제안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우선 제 입장을 밝히자면 저는 힙합과 문학 사이에 어떤 유비적 관계도 성립시키고 싶지 않습니다. 그래도 인터뷰는 인터뷰니까 필요한 대답이 필요하겠죠.

“드뢉 더 빛”으로 시작한 서호준의 소설이 《문학과사회》 최종심에서 간단히 언급만 되고 떨어졌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말할 수 있겠습니다.

한국힙합은 한국문학의 사생아다.

이거면 핑계는 충분하지 않을까요?

 

 

46

앗.. 그렇죠. 한국힙합이라는 주제에 대해선 제가 먼저 제안했었죠. 아무래도 제 무의식이 그 사실을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숨기기 실패. 숨기기에 실패했으니 이제부터는 좀 더 대담하게 힙합이란 단어를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무튼 다시, 그렇다면 말씀하신 “한국 힙합은 한국 문학의 사생아다”부터 시작을 해보죠.

 

90

아무래도 지금의 시점으로는 힙합과 문학 사이의 거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2000년대 초반 문학은 ‘자아’를 배격하는 방향으로, 2000년대 후반 힙합은 ‘자아’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그 거리감은 계속 심화되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이라면 상황이 조금 달랐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렇다면 힙합이 문학이 되길 원했던 시절부터 시작하는 것이 순서일 것 같습니다. 가령 지금의 그 팔로알토와 더콰이엇이 <Young poets>(20 04)에서 “Young Poets, 젊은 시인들의 꿈”이라고 말했고 이센스가 이그니토의 곡 <Lost Chronicle>(2006)에서 이 구절을 인용 했습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지점은 옛날에는 ‘문학성’이라는 것이 래퍼들에게 필요로 되는 자질이었다는 점이고, 또 소위 ‘문학성’이라는 자원이 래퍼들이 자신을 알리기 위한 유용한 자원이었다는 점이죠. 그런데 이제 누가 ‘문학성’을 내세우면서 랩을 할까요? 물론 있겠지만 그 위치는 옛날과 같지 않습니다. 문학은 힙합에 있어 은유로서의 아버지였고, 지금은 기능을 하지 못하는 아버지입니다. 혹은, 불필요해진 아버지입니다. 지금 더콰이엇이 ‘시’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활용하는 방식은 고작해야 ‘밀리어네어’와 상반되는 하나의 작은 극으로서, 머니스웩으로 자취를 감춘 ‘내면’이라는 사라진 소실점을 다시 복원하기 위한 작은 통로로 사용될 따름입니다. 지폐의 반짝임과 대비를 통해서만 가치를 얻는 구차한 방법으로, 또 외부로는 감히 통어(通語)될 수 없는 비밀로서 그 ‘문학성’이 존재합니다. 여기서 더콰이엇의 다른 옛날을 생각해봅시다. 그는 마치 자신이 모두를 ‘재현’할 정당성을 부여받은 것처럼 굴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땅에 숨 쉬는 이들의 고뇌 / 그것은 내 손에 쥔 펜과 Microphone의/ 작은 기적을 통해 읊어지는 노래”(<Rap Game Pt.2>(2004)). 여기엔 알게 모르게 ‘투명한 재현’이라는 것이 가능하다는 말이 전제되어 있습니다. 이 부분은 따로 정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만, 더 화급한 건 왜 지금 ‘내면’이나 ‘문학성’이 불필요하거나, 자아를 연출하기 위한 연극적 소품으로 떨어졌냐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렇게 물을 수 있겠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해, 힙합은 어느 시점부터 ‘내면’에 대한 욕망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 내면을 소품으로조차 잘 사용하지 않게 되는 걸까요? 어떤 이유에서 ‘문학성’은 상품으로서의 설득력을 상실한 것이고, 또 그 자리를 대체한 것은 무엇일까요?

 

46

“‘내면’이나 ‘문학성’이” “자아를 연출하기 위한 연극적 소품으로 떨어졌”다고 지적하셨는데, 힙합에게 있어 문학이 은유로서의 아버지였던 시절, 그러니까, “힙합이 스스로 문학이 되길 원했던 시절”이라는 표현에 대해서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언급하신 <Young poets>의 hook을 인용합니다.

이것은 바로 젊은 ①청춘의 시

일말의 후회조차 없을 테니

멈추지 않고 ②이 길을 걷겠지

내가 써내려가는 청춘의 시

This is rap for ⓐreal untouchable shit

─팔로알토, <Young poets>(feat. The Quiett, 성문)(2004) 중 (강조-인용자)

 

인용문에서 “이것”(rap)의 비유 대상은 ①청춘의 시②이 길입니다. 이 ①→②의 진행 속에서 ‘힙합’은 ①특정 시간(“청춘”)의 수행적(“써내려가는”) 양식(“시”)에서, ②자기실현의 공간이자 삶의 지표(“길”)로까지 확장되고 있습니다. 단지 이러한 비유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힙합이 스스로 문학이 되길 원했던 시절”이라는 지적은 합당해보이고, “은유로서의 아버지”라는 문학의 자리는 굳건해 보입니다. 그러나 제 의문은 ‘ⓐreal untouchable shit’에 이르렀을 때 발생하게 됩니다. ⓐ를 위한, 혹은 ⓐ에 도달하기 위한, “이것”(rap)의 자리는 “이것”(rap)이 ①→②를 경유함으로써만 도달할 수 있는 영역처럼 보입니다. 풀어쓰자면, “힙합이 스스로 문학이 되길 원”하는 과정(①→②)에서 힙합이 획득한 함의─수행적 양식이자 자기실현의 공간으로서의 힙합(“rap”)─는 진리(“real untoucha ble shit”) 파악의 실체로써 복무(“for”)하게 됩니다. 인용에 대한 방금의 해석을 통해 힙합의 존재론적 지위가, ①→②의 비유(‘문학성’)를 거쳐, 진리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또 그러한 한에서 문학이, 힙합의 존재론적 지위를 확장하는 도구로써 사용되었다는 혐의를 지울 수 없습니다. 이제 이때의 힙합을, ‘이중의 문학’이라는 구조 속에서 포착하지 않는 한, 단지 “힙합이 스스로 문학이 되길 원했던 시절”이라고 말하는 것은 불충분해 보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차라리 문학─“‘내면’이나 ‘문학성’”─이 애초부터 힙합의 “자아를 연출하기 위한 연극적 소품”이었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에 대한 90님의 의견이 궁금합니다.

 

 

90

물론 적절한 지적입니다. 하지만 저는 여기서 ‘아버지’라는 은유를 더 확장해보고 싶습니다. ‘아버지’는 애초에 무조건적인 모방의 대상이 아닙니다. ‘아버지’가 동일시의 대상이 되는 것은 자신이 ‘욕망’하는 ‘어머니’를 ‘소유’하는 한에서입니다. 말하자면 ‘아버지’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라 하나의 ‘수단’으로 존재합니다. 그러한 바, ‘아버지’라는 은유의 방향을 약간 뒤집어보면 ‘아버지’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또 여전히 기능하게 됩니다. 결국 옳습니다. 힙합은 언제나 문학을 하나의 자원정도로만 취급했습니다. 당시에 힙합이라는 문화가 ‘양아치 문화’라는 혐의를 받던 시절이었던 탓에 그들은 내면을 발명할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한 수단으로 문학성을 동원했음을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힙합은 스스로 존재하기엔 기반이 허약한 장르였습니다.

한편으로는 Real에 대한 아주 복잡한 논의가 필요하겠습니다. 카운터-컬쳐로 시작한 한국의 1세대 힙합에서 ‘Real’의 의미는 단순하면서도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우선 이들은 사회에 느끼던 환멸의 바깥으로서, <상자 속 젊음>(더콰이엇, (2005))과는 대비되는 진정한 ‘꿈’의 장소를 표상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한 전략을 모색하기에 이릅니다. 이런 담론전략을 분석하자면 조금 구차해지지 않을 수 없지만 어쨌거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꿈’ 또는 ‘예술 일반’의 대표자의 자리가 문학에 위임되었다는 부분입니다. 장르 음악으로서의 ‘힙합’과 참된 ‘예술’ 사이의 간격을 누비기 위해 선택된 바늘이 ‘문학’이었습니다.

요컨대 스스로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될 수 있었던 그 많은 것들 가운데 ‘문학’이 선택되었다는 말입니다. ‘아버지’라는 것은 전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고, 때론 증오할 수 있되, ‘기능’할 수 있는 것의 전형인 셈입니다. 그 ‘전형’이 바로 문학이었고,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이죠. 빈지노가 <Dali, Van, Picasso>(2013)를 자신의 선배로 내세우고, 천재노창이 이를 받아서 “탈레반 피카소”로 뒤집을 때 시인의 이름은 단 한 차례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창모가 바흐와 쇼팽을 “선배였지”(<마에스트로>(2016))라며 회고적으로 자신의 중학생 시절을 술회하는 모습과 <아침에>(2017) 떠있는 해를 마음대로 “색칠”한다는 영비의 진술에서도 드러나듯 이들에게 ‘시’보다는 오히려 여타의 예술 장르가 ‘예술 일반’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충분히 예증한다고 생각합니다.

다소 돌아오는 이야기가 되었지만, 결국 과거에 ‘문학’이 누리던 지위는 사회적으로 통용될 수 있는 ‘공통성’의 담지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더콰이엇을 비롯한 대부분의 래퍼가 ‘문학’을 자신의 소품으로 운용하는 방식에 비추어볼 때, ‘문학’은 결국 타인과는 결코 공유될 수 없는 ‘단독성’의 소박한 처소로서 간신히 등장할 뿐입니다.

 

 

46

‘문학’이라는 아버지는 힙합이 “스스로에게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 동원한 “‘예술 일반’의 대표자”였다. ‘전형’으로서의 아버지. 맞나요? 그 지적에는 동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양상이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는” 지적에 대해서는 의문입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문학’과 ‘문학성’을 구분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문학’과 ‘문학성’. 앞에서 말씀하신 ‘아버지’의 지위와 지금 답하신 ‘아버지’의 지위는 사뭇 다른 것 같습니다. 답변을 따라 전자의 예를 <Young Poets>, 후자의 예를 <상자 속 젊음>이라 했을 때, 그 둘이 ‘문학’을 사용하는 것과 관련해선 다음의 구분이 가능합니다.

<Young Poets>는 ‘문학’(“시”─대상 A)을 전면에 드러내고 있으며, 또한, ‘문학’이라는 아버지가 되고 싶어 한다는 혐의─모방의 대상으로서의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모방의 방법론이 문학이라는 아버지의 잔상인 은유라는 점에서, <Young Poets>는 ‘문학’을 ‘통째로’ 모방하고 있다고 해도 좋을 것 같습니다; ‘아버지’(대상 A)를 모방하기 위해 ‘아버지의 잔상’(대상 A의 이름을 대상 B의 이름에 전용하는 방법론)을 사용한다. 여기서의 문학의 외피(“시”)를 ‘문학’, 문학의 성질(은유)을 ‘문학성’이라 거칠게 구분하자면, <상자 속 젊음>에는 단지 ‘문학성’만이 있을 뿐입니다. <상자 속 젊음>은 문학을 모방하지 않고(차라리 ‘만화’를 모방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우리의 삶은 네 컷 만화”), 은유라는 문학의 성질, 즉, ‘문학성’만을 모방합니다. 물론 대상의 어떤 성질만을 재현하는 것이 모방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신중할 필요가 있겠지만(또 대상의 외피를 그 대상의 성질의 영역에 포괄하느냐 마느냐의 여부에 대해서도), 이들이 ‘문학이라는 아버지(혹은 전형)’─‘문학’과 ‘문학성’을 포괄하는─를 사용하는 방식을 구분하기 위해 말하자면 그렇다는 겁니다. 이 주장을 따라가게 되면 전자와 후자 모두에게서 문학이 어떤 ‘전형’으로서의 아버지인 것은 맞지만, <Young Poets>에서의 아버지와 <상자 속 젊음>에서의 아버지의 지위가 동등할 수는 없게 됩니다.

‘문학’과 ‘문학성’, 또, 그것의 모방이라는 다소 거친 구분을 한 이유는, 이어서 언급하신 세 가지 곡─<Dali Van Picasso>, <마에스트로>, <아침에>─때문에라도 그렇습니다. 그들이 ‘문학’이라는 전형을 사용하는 방식은 <Young Poets>와는 다르지만 <상자 속 젊음>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문학을 채택하진 않지만, 문학성은 여전히 채택하고 있습니다.

 

반 고흐의 달이 보이는 밤

나는 물감(A)을 고르듯 단어(B)를 골라

(중략)

물감 묻은 붓(A’)같이 끈적이는

여름 밤(B’), 내 목소린 곳곳에 퍼졌지

─Beenzino, <Dali Van Picasso> 중 (강조-인용자)

 

 

베르사체 무한리필 drank(A)

그게 내 1악장(B)

Maserati car 하얀색 대리석 house(A’)

그게 내 2악장(B’)

(중략)

파 묻고 선언했지 내 자신(A”)

classic(B”)을 딱 박아둬

─창모, <마에스트로> 중 (강조-인용자)

 

 

그저 내 삶(A)

나의 도화지(B)

─Young B, <아침에> 중 (강조-인용자)

 

<Young Poets>에서의 ‘문학’의 자리는 ‘회화’나 “classic”으로 대체되었으나, ‘회화’(와 회화성)나 “classic”(과 classic성)은 여전히 ‘문학성’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냅니다. 스스로에게 진정성을 부여함에 있어 은유라는 방법론이 다분히 기능적이라는 한에서, 힙합에서 문학이라는 전형의 ‘은유로서의 아버지’는 여전히 기능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논리를 따르면서 이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힙합에서 문학이라는 아버지는 불필요해지지 않았고, 문학은 오히려 퇴치불가능의 유령이 되어 힙합의 공터를 배회하며 수시로 출몰하고 있다.(차라리 힙합씬을 ‘유령의 집’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런 의견은 어떠신가요?

 

90

확실히 ‘은유’의 바깥은 있을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은 은유입니다. 우리가 ‘은유’와 ‘환유’라는 거대한 축을 인정하고, 오규원식으로 ‘날이미지’의 즉물적 전개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만, ‘작동’하는 것은 언제나 은유입니다. 그렇지만 ‘문학성’을 역사화하는 식상한 연구 방법론이나, 끈질긴 ‘고유명’과 ‘은유’의 문제로 들어가기 전에 여기서 하나의 중요한 정리를 하고 가야겠군요. 제가 느끼기에 ‘은유’와 ‘문학성’이 힙합 위를 배회하고 있다는 문제는 중요하지만, 시급하지는 않습니다. 이 주제는 잠시 유보하도록 하죠.

개인적으로 이제까지의 ‘문학성’에 있어서 특권적인 지위를 차지하는 것은 어떤 ‘초월적 지평’에 대한 기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문학에 그러한 본질이 없음은 당연하지만) ‘역사적’인 제도적 글쓰기-양식으로서의 ‘문학’을 이야기할 때, ‘문학’은 언제나 돌파하려고 했고, 돌파하려고 하지 않은 문학에 대해선 어떤 평론가도 칭찬을 건네지 않습니다.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넘어가려는 횡단의 의지가 근대적인 의미의 ‘고유성’을 향한, ‘고유성’이 주어지기 위한 최저조건입니다. 앞을 안내할 별자리가 더는 총총하지 못하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닙니다. 문학은 발장단을 맞추며, 엇박을 계속 딛는 수밖에 없습니다.

2000년대 중반 팔로알토가 <영광의 나날>(2006)이 “머지않아 찾아올” 것이라고 말하면, 가리온이 <약속의 장소>에서 “다시 만나”자고 답해주던 시절의 그들에게는 ‘꿈’이라는 것이 ‘여기’에 있지 않았습니다. 이들에게 ‘미래’는 언제나 도래할 형식으로 존재했고, 여기로부터 먼 어딘가에 있었습니다. 지금 이곳은 도래할 미래를 위해 희생되어야 할 발판이며, 육체성은 언제나 추악한 것으로 남아있었습니다.

도래할 미래에 대한 헌신적 자세가 늘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러한 태도는 ‘금욕주의’로 쉽게 이어집니다. “그래서 넌 돈 좀 벌었니? 배팅도 커졌니? 그럼 너도 얄짤없어! 이판에 붙은 거머리”(<진흙 속에서 피는 꽃>(2007))라고 비난의 칼을 빼어든 가리온은 당시로서는 절대적으로 온당한 비난을 펼쳤습니다. 그렇다면 다시, 당시의 에피스테메로 진입해봅시다. 하나의 ‘발화’가 진실로서 승인되고 어떤 ‘장’ 안에서 통용되기 위해서는 특정한 기준을 충족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당시의 규칙은 바로 발화자 그 자신이 ‘포기한 것’의 합으로 계산되었습니다. 요컨대 ‘나’는 이만큼을 포기했으므로 당연히 이만큼 진정하고, 포기하는 법이 없는 ‘너’는 진정하지 못하다, 라는 셈법이죠. 따라서 당시의 ‘진정성’은 두 가지의 축으로 정리될 수 있겠습니다. 첫째, ‘초월적 외부’ 또는 ‘실재’를 향한 열정. 둘째, 목적에 대한 도덕적 염결성과 무조건적인 헌신. 즉, ‘대상’에 대한 ‘포기’가 2000년대의 앞머리에 놓인 규칙입니다. “나는 ~를 위해 ~까지 포기했다.”

이 주형틀 속에서만 화폐는 유효성을 얻었고, 유일한 조폐국으로 기능했습니다. 그러나 스윙스의 짤막한 메니페스토 하나가 모든 것을 뒤집습니다: “돈돈돈돈, who doesn’t like that”(<난 돈 번다>(2011)). 지금도 부담스러운 이 도입부는 ‘초월적 외부’와 ‘포기’라는 두 가지 형식 모두를 벗어나면서 ‘내부’의 ‘욕망’으로 위 둘을 대체합니다. <꽐라 remix>(2009)에서 “내 이름은 잊어도, 내 번호는 잊지 마”라고 말하는 스윙스의 라인은 결정적입니다.

‘고유명’이 되려는 욕망을 나의 ‘육체성’이 대신하고, ‘나’보다 나의 ‘물질성’이 전면에 들어서게 됩니다. 요컨대 스윙스에 이르러 ‘나’는 ‘이름’ 대신에 ‘번호’가 됩니다. 이 단 하나의 라인은 당시까지의 금욕사제적 전술을 모두 무너뜨리고, 도래하려는 천년왕국의 문에 기꺼이 걸쇠를 겁니다. 이어지는 프로파간다. “내가 죽어도 내 돈은 벌어줘”라는 재키와이의 <Enchanted Propaganda>(2018)는 스윙스가 열어젖힌 다른 세기를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감히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2000년대 중반 이후 ‘진실’을 말하는 방식에 큰 변화가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초월적 지평’이 ‘내재성’으로 대체되는 동시에 그 ‘진실’을 말하기 위한 기준 자체가 바뀌어, 드디어 ‘진정성’의 돈다발이 찢긴 자리에서 두 개의 위폐가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 된 셈이죠.

 

 

46

모더니즘의 꿈의 수행자가, 어느 평론집의 제목에서처럼, ‘우울한 모던 보이’로밖에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떠올렸을 때, “앞을 안내할 별자리가 더는 총총하지 못하다고 해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발장단을 맞추며, 엇박을 계속 딛는 수밖에 없”다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위로가 되는 것도 같습니다. 위로라니. 흠. 아무래도 직전의 말은 취소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아무튼 우울을 떨쳐내고 다시 인터뷰로 돌아오자면,

앞의 질문(‘문학’과 ‘문학성’)에 대한 답변은 “‘은유’의 바깥은 있을 수 없습니다.”라는 문장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마 동의하시겠지만, ‘고유명과 은유의 문제’에 대해선 이미 여러 사상가들의 걸출한 논의가 있었기에 이에 대해 첨언하는 것은 동어반복이 될 소지가 다분하므로, 또, 인터뷰의 주제에 가까운 위치로 다시 돌아오고자, 이쯤에서 카메라의 초점을 조정하는 편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진정성을 말하는 방식이 금욕주의(초월적 지평)에서 속물주의(내재성)로 바뀌었다는 지적이 힙합씬의 발화 내용 변화를 잘 요약하고 있는 것 같은데, 여기서의 ‘내재성’에 대해 더 이야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인용하신 가사처럼 확실히 한국힙합은 언제부턴가 ‘돈’에 대해 말하는 것 같습니다만, 이 내재성이란 것이 단지 배금성拜金性만을 담지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Q1) ‘내재성’이 포괄하고 있는 항에는 또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그리고 하나 더, “두 개의 위폐가 경쟁하고 있는 형국”이라는 표현으로 미루어 보아 초월적 지평에 대한 기대 내지는 지향으로부터의 Q2) 금욕주의가 힙합씬에서 여전히 유효한 ‘진실’의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데, 이것의 사례로는 어떤 것이 있는지, 또, 그것이 경쟁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유효한지도 궁금합니다.

 

 

90

2000년대의 어느 한 시점 이후, 진정성을 측정하는 방식이 대체되었다는 가설로 시작하는 편이 좋겠군요. 문학인에게 ‘예술’과 함께 ‘생활’이라는 불가피한 생각이 있는 것처럼 힙합에서도 “Get real, get money 둘 사이를 못 떼”어 놓는 현실은 결국 “Money recognize Real”이라는 명제로 이행하게 됩니다. “난 돈을 노래하니까 그러니 난 가짜는 죽어도 못 ”된다는 것이죠.(슈프림팀, <Respect My Money>(2010)) 이 귀여운 논리는 이후 크게 정교화되는데 이 부분이 주목을 요합니다.

저스디스가 “난 적어도 딴 래퍼들이 술자리에서만 하는 말 음악에서 보여줬”(<Indigo>(2018))다고 떠벌리는 부분은 사실 지금으로선 크게 충격적이지 않습니다. 상투적이니까요. 그리고 이 라인이 전제하는 것은 바로 ‘돈’의 투명성입니다. 알려진 것과 같이 ‘화폐’는 이질적인 물건들을 하나의 산술적 단위로 환원하기 위한 수단입니다. 따라서 이 ‘돈’에 의해서만 움직이고 측정되는 ‘나’의 목적은 언제나 투명할 수 있는 반면,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어딘가 불경한 목적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수지타산 맞으면 어디든 We Just Go”(<Indigo>)라는 저스트 뮤직은 사실 “진짜로 살고 있으니까, 정직하게 Pay 받”(<Break Bread>(2018))는다는 하이라이트 뮤직과 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습니다.

과거의 ‘초월적 지평’은 모두 계산 가능한 단위로 바뀌고, 그 ‘바깥’은 의심스러운 것으로 변한 정황이 드러났습니다. 어쩌면 이것은 ‘근대’라는 프로젝트의 당연한 결과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돈’은 ‘나’의 노력에 의한 정당한 결과물이고, 따라서 ‘나’의 노력을 증거합니다.

빈지노가 “내가 침 튀길 때 니넨 죄다 침대에서 쉰 뒤 뒤늦게 뛰다 말고 핑곌”(<A Better Tomorrow>(2014)) 댄다며 다른 래퍼들을 비난할 때, ‘진정성’을 매개하는 가치는 ‘희생’에서 ‘근면’으로 미묘한 위치전환을 이룹니다. 마땅히 피 튀겨야 할 디스전에서 스윙스가 어글리덕에게 공격이랍시고 던진 라인은 결국 그가 만들어낸 작업물이 부족하다는 이야기였습니다. “넌 믹스테잎이 한개, 넌 믹스테잎이 한계.”(<황정민(King Swings Part 2)>(2013)) 이 라인이 함축하는 바는 간단합니다. 모든 가치는 작업물의 숫자로 축소됩니다. 더 많은 작업물은 더 큰 노력을, 더 큰 노력은 결국 ‘돈’으로 보상되므로 ‘돈’은 ‘진정성’과 상호보증의 관계에 있습니다.

바꾸어 말하면 새로운 ‘원근법적 소실점’으로서 화폐가 등장했습니다. 화폐의 매개를 통해 우리는 이질적인 ‘사물’들을 하나의 등질공간 속에서 하나의 규칙에 의해 배열할 수 있습니다. 인간이 기본적으로 질서를 선호하고 무질서를 견디지 못한다는 가정에 동의한다면, 그래서 우리의 무의식조차 언제나 구조화되어 있다는 가정을 받아들인다면 ‘화폐’를 통해 말하는 이득은 분명합니다. 돈 앞에서 ‘세계’는 가지런합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면 과거 ‘희생’의 문법은 완전히 소멸한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기억하시는 것과 같이 저는 ‘진정성’의 두 화폐가 경합을 벌인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처한 국면은 단순한 경쟁이 아니라 화폐처럼 서로가 서로에 의존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규정하는 국제경제입니다. 가령 우원재가 과거의 문법을 동원하며 시대착오적 금욕사제로 등장할 수 있습니다. 이런 라인이 있겠죠. “근데 니들이 꿈을 꾸던 그 시간에 / 나도 꿈을 꿨지 / 두 눈 똑바로 뜬 채로”(<시차>(2017)) 그리고 바로 이 일갈 역시 동일한 ‘도덕화’의 싹을 품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경합하는 두 진정성의 레짐은 결코 독립해서 존재하지 않습니다. 부자는 원화로도 남겨먹고 달러로도 남겨먹어야 합니다. ‘금욕’과 ‘포기’의 문법에 ‘욕망’으로부터 촉발된 ‘근면’의 기억을 겹쳐놓습니다.

장황했지만 세 가지를 지적하고 싶습니다. 첫째로, 힙합씬에서 진정성의 측정 방법이 ‘포기의 크기’에서 ‘이뤄낸 숫자’로 변화했다는 점. 주의할 것은 ‘꿈’을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문제가 아닙니다. ‘나’ 혹은 ‘나’의 꿈을 말하는 방식이 변했다는 것이죠. 이 지점에서 다소 부차적이지만 미묘한 문제가 끼어듭니다. 삶을 ‘추상화’하고 수치로 바꾸어놓는 화폐를 통해 오히려 ‘육체성’이나 ‘물질성’을 긍정하게 되었다는 점이 바로 그것입니다. 둘째로, 새로운 화폐가 등장했다고 기존의 화폐와 완전히 불화하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둘은 서로를 보충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입니다. 셋째로 ‘돈’이라는 투명한 기호가 확립되었다는 점입니다. 과거 근대문학이 자리잡던 시기에 ‘언문일치’라거나, ‘서간체’의 발명을 통해 ‘불투명성’을 걷어낼 무언가가 늘 필요했단 점을 생각해보면 이는 결정적입니다. 근대적 글쓰기에 있어서 수신자와의 관계설정─실질적 수신자를 무위치에 장소시키는 것을 포함한─이 언제나 핵심적인 문턱으로 자리하고 있음을 생각해보면 ‘돈’이라는 투명한 기호는 의미가 큽니다. 문학이 ‘유용성’의 반대편에서, 그 불투명함을 통해 유용성이 인간을 얼마나 억압하는 것인지 보여준다는 에피그램과는 정반대에서, 유용성이 유통시킬 수 없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는 힙합과 문학이 꽤나 멀어졌음을 단적으로 확인시켜줍니다. 여담이지만 문학 역시 자신만의 ‘불투명성’을 만들기 위해 투명한 기호를 필요로 했습니다.

 

 

46

답변을 정리하자면, 2000년대 중반까지의 진정성(‘초월적 외부’와 ‘포기’)이 화폐의 세계라는 통약가능성의 세계에 흡수됨에 따라, ‘초월적 외부’라는 근대적 환상이 제거 혹은 대체되었고, ‘포기’의 문법(<진흙 속에서 피는 꽃>)은 속물주의의 한 문법인 ‘근면’의 문법(<시차>)─기저에 물질적 욕망이 자리하는─에 흡수되었다: ‘돈’이라는 투명한 기호, 투명한 세계.

이것을 통해 저의 앞선 두 가지 질문─

Q1) ‘내재성’이 배금성만을 담지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포괄하는 다른 항은 무엇인가?

Q2) ‘금욕주의’가 힙합씬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작동하는가?

─에 대한 답을 다음과 같이 통합하여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1. A) ‘내재성’은, 스윙스의 메니페스토 직후에 배금성만을 담지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곧 ‘금욕주의’의 ‘포기’의 문법 또한 (‘근면’의 모습으로) 흡수하였다. 이제 이 두 가지 진정성의 레짐, 금욕주의와 속물주의(“두 개의 위폐”)는 ‘물질성’에 대한 투명한 욕망 위에서 대리보충의 모습으로 서로 경쟁한다.

말씀하신 바와 같이 2000년대 중반부터 2010년대의 힙합이 ‘투명한 기호, 투명성의 세계’로의 지향을 가감없이 수행하고 있다고 했을 때, 힙합에는 더 이상 규명해야 할 ‘초월적 대상’이라는 불투명한 모자이크가 부재합니다.(불필요해서 더 이상 요청되지 않는다, 라고 말하는 편이 적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기서 “힙합과 문학이 꽤나 멀어졌”다면 그것은 ‘(불)투명성-교환(불)가능성’에 대한 태도와 관련될 터인데, 이것에 대한 90님의 지적(상기의 ‘유용성’ 부분)이 흥미롭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해당 부분에서 짚고 넘어갔으면 하는 것이 있습니다. 상기 답변의 맥락 속에서 “유용성이 유통시킬 수 없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는 ‘유용성’의 반대편에서 가능한 태도라기보단, ‘유용성’의 진영에서 가능한 태도로 보입니다. 지금 인용하고 있는 문장은 이런 식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약불가능성의 세계에 자리하는(한다고 여겨지는) 모든 것을 의심하는 태도’. ‘미래파’를 끌어들인 맥락 속에서야 이것은 충돌 없이 읽히는데, 지시하신 맥락이 그러하다면, 그 부분에 대한 보충설명과 함께 힙합과 문학 사이의 멀어짐에 대해서도 더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90

먼저 문학으로 점프할까요?

2000년대 이후 문학이 처한 곤경‘이 어느 정도 분명해지는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00년대 비평의 메타 내러티브가 ‘상징계’의 몫을 ‘실재계’로 돌리면서 성립했다고 보는 견해에 동의하고 있습니다. 후속 논의의 핵심적인 논점, ‘상징계’ 외부의 ‘실재’에 대한 충실성이 결코 ‘자아’의 도덕적 염결성으로 이어지지 않고 오히려 거기에서 ‘외설적 쾌락’을 착취할 수 있다는 것은 박상수를 비롯한 평론가들의 지적으로 분명해졌습니다.

그러므로 문학이 ‘자아’의 몫을 취하지 않았다는 것을 내세움으로써, ‘상징계’의 언어에 ‘저항’하는 방식으로, 교환불가능성을 끝내 고집함으로써 ‘진실’의 가치를 승인받을 수 있던 시대가 종언을 고했다고 하겠습니다. 마침내 싸움은 ‘상징계’ 내부의 인정투쟁의 장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빛을 피해, 실재계를 향해 필사적인 돌파를 시도하는 잔당들이 완전히 소탕되지는 못했지만, 저는 드디어 한 시대를 지배하던 미학적 규준이 힘을 잃었다고 봅니다. (*미주1)

2000년대 후반부터 10년대에 이르는 힙합이 문학과 공유하는 것이 있다면 ‘당신이 보는 것이 당신이 보는 것이다’라는 일종의 ‘즉물주의’입니다. 여기엔 ‘비가시성’ 또는 ‘믿음’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또는 절대적인 ‘믿음’이 치명적인 비가시성을 덮어주고 있습니다.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화폐라는 ‘추상물’인 동시에 ‘가시적인 것’화폐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서의 ‘꿈’을 대체하는 경향, 또는 오히려 ‘꿈’의 가시적 증거물로서 ‘화폐’가 등장하는 시대를 맞이합니다. 그리고 그 사이를 매개하는 ‘근면’이라는 이데올로기를 통해 ‘꿈=근면=숫자’라는 연결고리가 성립하게 됩니다. 2010년대 힙합의 메타 내러티브를 거칠게 요약하면 그렇습니다.

따라서 이제는 진짜 숫자처럼 말하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입니다. 세계는 교환가능한 세계 속으로 진입합니다. 조금은 더 문학의 편에서 말하자면, 2000년대의 미래파는 어차피 ‘실재계’라는 초월적 외부가 없다는 것을 1)알면서도 2)믿었습니다. 이 아이러니컬한 자의식 조작을 통해서 어쩌면 2000년대의 마지막 전위가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다시, 2010년대의 풍경은 ‘믿음’을 불가능한 것으로 처리하는 냉소주의적 색채로 착색됩니다.

 

 

46

‘미래파’라는 명명 아래 묶였던 2000년대의 시적 흐름이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힘을 잃었다”는 말은 결과론적인 입장에서 대부분이 동의할 수밖에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기점의 흔적은 “끝내 고집함”이라는 표현 속에서나마 추상적으로 상상할 수 있겠습니다. 머릿속에 그들의 모습을 그려보자면 그들은 항상 필사의 질주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멀지 않은 거리에 깨부술 수 없는 벽을 세우고 하는 전력질주. 아이러닉하게도 그 ‘자살-달리기’의 방식이 그동안 보지 못했던 또 다른 달리기의 세계를 ‘진실’하게 보여주긴 했지만 말입니다. 90님을 패러디하자면, 미래파는 애초에, 이 자살-달리기에는 골인지점이 없고 설령 그것이 있다하더라도 그것에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벽에 부딪혀 죽는다는 걸 1)알면서도 2)달렸습니다. 그리고 다시, 2010년대의 문학은 골인지점 따위가 없다는 것을 1)알고 있으므로, 2)달리지 않습니다. 그들은 더 이상 달리지 않고, 걷거나 멈추며, 혹은, 역행하거나 트랙을 벗어나기도, 서로의 손을 잡고 그들만의 산책을 하기도, 서로에게 별 관심을 보이지 않기도 합니다. 이제 더 이상 거대한 경기장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주머니 속 사물, 내 앞의 사물이 더 중요하고, 세계는 곧 그것 위에서 자리하게 됩니다. 고요한 규칙 개정, 혹은, 종목 변경. 제가 잠시 신났던 것 같은데 다시 인터뷰로 돌아오자면,

‘꿈=근면=숫자’라는 연결고리. 가시적인 것이 비가시적인 것을 대체하는 경향은 일상적이면서도 문제적인 것 같습니다. 90님의 답변을 좀 더 보충하자면,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의 ‘꿈’이 모더니즘의 ‘꿈’과는 다르다는 것을 상기해야합니다. 과격하게, 그러나 솔직하게, 2010년대 힙합의 메타 내러티브 속에서 숫자(화폐)라는 꿈은, 상징계 안에 자리하는 근시안적인 (자아의) 꿈입니다.(상기의 ‘내재성’ 논의) 이 ‘숫자’를, 기호의 세계라는 포스트모던의 세계를 규명하는 열쇠로서의 숫자로 서둘러 갈무리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에서의 숫자는 기호의 세계의 부산물로서의 숫자입니다.

여기까지 오게 되면 우리는, 힙합과 문학의 멀어짐을 아래와 같이 그려볼 수도 있습니다. 먼저 문학.

2010년대의 문학은, 2000년대의 문학이 필사적으로 마주한 꿈(초월적 외부)의 불가능성을 계기로 꿈에의 트라우마를 앓게 됩니다. 그것의 대표적인 증상으로써 시적 화자의 무기력이 있겠습니다. 이제 문학에서 과거의 문학이 지향했던, 혹은 상정했던, 세계(성)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습니다. 세계에 대한 믿음은 더 이상 작동 불가능하고, 따라서 세계의 지위는 격하됩니다.(이것의 증례에 대해선 90님의 입을 빌리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내 앞에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세계가 됩니다─즉물주의.

그러나 힙합은 다릅니다. 힙합은 꿈의 불가능성(상기의 ‘금욕주의’ 논의)을 계기로 꿈에의 트라우마를 앓지 않습니다. 오히려 불가능성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힙합의 구심축이 되어버린 ‘화폐-자본’이라는 잡식성 괴물은 그 불가능성을 먹어치웁니다.(‘근면’의 문법) 여기에는 무기력이 개입할 자리가 할당되지 않습니다. 단지 “진짜 숫자처럼 말하는 것만이 유일”해집니다. ‘꿈=근면=숫자’의 연결고리에의 몰입, 눈앞에 보이는 화폐에의 몰입이 곧 세계에의 몰입이 됩니다─즉물주의.

이 ‘작아진 세계’에서 우리는 이제 무엇에 대해 더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90

미래파의 달리기에 대해 조금 보태보고 싶군요. 이어지는 세대의 이어달리기를 위해서도 필요한 분석일 테니까요. 미래파의 달리기는 “오늘의 반대말은 무슨 요일인가?”(이장욱, <반대말들>(2011))라는 태연자약한 질문으로부터 비롯됩니다. 기존 질서 속에서 ‘반대’를 형성하지 않는 사물에게 이항대립을 부여하는 유머를 통해 세상의 의미(방향) 자체에 대한 항의를 제기하는 방식이죠. “나 잠깐만 죽을게 삼각형처럼”(김소연, <수학자의 아침>(2013))과 같은 시구는 고전적인 기준에서는 ‘구체성’을 상실한 일종의 금구(禁句)입니다. 논리적으로 존재할 수 없는 벽을 등장시킴으로써 입체성이나 공간감을 갈취하는 이 현란한 테크닉이 무한공간을 만드는 주요 테크닉이었음은 물론입니다. 차안으로부터 (삼각형을 통해) 한달음에 피안을 찍고, 돌아서선 마치 그게 가역적 사태라도 되는 것처럼 가벼운 미소를 짓는 저런 태도엔 반대할 수 없는 금기의 매력이 있습니다. 피안에서도 여권을 잘 찍어주던 시절이었고, 과연 초창기였기에 그곳으로의 프리패스도 저렴했습니다.

어쩌면 중복되는 이야기일 수 있겠지만, 풍부함을 위해 힙합으로 다시 도망치고 싶군요. 특히 ‘스팸 이미지’를 말하고 싶습니다. 주류 힙합이 보여주는 스펙타클은 언제나 일종의 과잉입니다. 동시에 그것은 상징계에 대한 과잉신뢰이기도 하죠. 상징계가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상징계의 잘못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그 대상의 잘못입니다. 그런데 ‘대타자’의 전능성을 의심하지 않는 것은 차라리 증상이 아닐까요? 끔찍한 장면이 신을 찾을 빌미는 되어도, 신을 반박할 증거가 되지는 못하는 것을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래퍼들이 연출하는 ‘과잉 상징계’는 일종의 스팸 이미지이고, 이는 동일한 불가능성에 대한 다른 반응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누가 묻지 않아도 반복되는 라인들. “우린 지갑을 계속 불려”(쿠기, <스즈란>(2018))간다는 자판기처럼 지루한 라인은, “십일조 봉투에 100만원을 100장씩”(비와이, <Forever>(2016)) 넣는 신앙심과 전적으로 같은 성격의 신앙고백입니다. ‘실재’에 대한 퍽 일반적인 반응이 ‘환상 시나리오’의 구축임을 고려한다면 ‘돈’에 대한 전적인 믿음은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작아진 세계’의 결과물입니다. 뒤집어 말해봅시다. 우리는 이제 ‘그곳’으로 가는 티켓을 사기보다 ‘그곳’으로 보내지지 않기 위해, 신앙의 값으로 티켓을 사고 있습니다. 대가의 이름이 등장하는 걸 겁내지 않는다면 할 포스터의 ‘외상적 리얼리즘’이라는 개념을 동원해도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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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필요한 반성을 하자면, 제가 힙합을 너무 과격하게 대한 것 같습니다. ‘스팸 이미지’─“상징계에 대한 과잉신뢰”라는 지적은 유의미한 지적 같습니다. 말씀하신대로 외상적 리얼리즘 개념을 가져왔을 때, 지금-여기의 힙합은 더 또렷하게 묘사되는 것 같습니다. 이 ‘스팸 이미지’들을 하나의 대형 오토마톤이라 했을 때, 우리는 그것이 애써 가리고 있는 ‘진실’을 자연스레 상상하게 됩니다. 또 여기서 힙합을 외상의 주체의 자리에 놓은 채 약간의 비약을 하자면, ‘스팸 이미지’를 ‘외상-트라우마 이미지의 과잉’이라 치환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과잉에서 발생하는 상처와 균열을 외면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상징계의 구멍’을 목격하게 되고, 또, 그것이 실재계를 암시한다는 점에서 분명 재밌는 얘깃거리(*미주2)가 시작될 것 같지만… 이쯤에서 지면의 한계를 떠올리며 90님께 도움을 청하는 바입니다. 인터뷰를 어느 지점에서부터 다시 이어나가는 것이 좋을까요.

 

90

이쯤에서 범람하는 ‘메타’라는 경향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저스디스가 <Indigo>에서 리한나와 에미넴을 끌어들이며 라인을 꾸미고, 나플라가 오래된 우탱 클랜의 싸인을 높이 들어올리는 한편, 블랙넛이 빈지노의 모든 것을 탐할 때, 힙합에서 장르적 관습에 대한 인용이 차지하는 위치를 가늠하는 일은 크게 어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러한 자기반영성이 전통과의 동일시를 통해 자신의 정체성을 얻어내거나, 관습을 의도적으로 비틀고 자신의 고유한 위치를 얻기 위한 복합적 전략의 소산임은 짚을 필요가 있겠군요.

거듭 당연한 말이지만 이러한 특징은 힙합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닙니다. 장르적 관습에 대한 인용, 또는 패러디는 문학에서도 언제나 존재했으며, 그렇게 장르를 다시 쓰고, 뒤집고, 파괴하는 일련의 과정 속에서만 하나의 글쓰기가 ‘문학’이라는 역사적 장르에 귀속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당연한 이야기를 계속 하는 것은 이 당연한 사태가 더 특별한 시의성을 갖기 때문입니다. 최근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메타’는 과거의 ‘메타’와는 판이합니다. 이를테면 김언이나 이수명의 메타가 ‘언어’라는 고정된 감옥 속에서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 대한 탐구였다면, 지금의 메타의 가능성은 오히려 시의 ‘관습’을 통해 역사화 되고 있습니다. <너는 이제 시인처럼 보인다>(2015)고 말하는 황인찬의 경우, “어디서 다 들은 이야기들이지”(<베테랑>(2015))라며 냉소하는 송승언의 경우 모두 ‘시’의 관습에 의해 작동을 시작합니다. ‘관습’은 시인을 작동시키는, 또는 작동을 실패시키는 기계입니다. 조연호가 “누군가 먼저 그렸을 삼각형을 오염된 것으로 생각하며 / 최대한의 삼각형을 그린다”(<결말의 꽃>(2010))며 쓸쓸한 반복을 시인했을 때, 그는 누나가 이미 겪어서 “하나도 새롭지 않을 거”(<영향력>(2012))라는 김승일의 화자와 함께, 시인들은 눈부시고 희박한 원 안으로 진입하게 됩니다. 이들 주자에겐 이전의 주자들이 갖고 있던 ‘어리석음’이 부재합니다. 심판이 액자라는 작은 원을 선언하자 심판을 여러 가지로 의심하는 사람들입니다.

이 지점에서 힙합과 문학은 하나의 분명한 교차점을 이룹니다. 예를 들어 빈지노는 <Flexin>(2016)이란 힙합의 상투어를 의도적으로 비틀며 “몸풀기”라는 사전적 의미로 운용하는 방식을 보여줍니다. 이 모습은 이전까지의 관습 비틀기와는 사뭇 대조됩니다. 자신의 ‘고유성’을 찾기 위해서라면 구태여 이러한 관용적 표현에 기대지 않고 오히려 독특한 단어를 고르며 언어를 조탁하는 고전적 지혜를 발휘함직도 하지만 그는 자신의 몫을 요구하기 힘든 관용어`를 고집합니다. 힙합적 토착어를 쓸 이유가 없음에도 그는 힙합의 관용어 속에서 자신의 고유성을 찾습니다. “규칙이 싫어 박자도 싫어”(<Indigo child>(2016))라며 어리광을 부리는 천재노창도 지독한 엇박 속에서만, 어쨌건 리듬 또는 음악 속에서만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깥’이 없다는 이전의 논점에 주목한다면 우리 모두가 ‘내부’에서 싸우는 싸움을 시작했다고 하겠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섬세한 주의가 필요합니다. ‘메타성’은 액자의 안에 존재하는 동시에 바깥에 존재하는 법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장르 관습의 내부에서, 장르의 ‘관습’을 철저하게 믿으며 하나의 완결성 있는 ‘작품’을 만들어내기를 거부하는 의지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지금 시점에서라면 ‘메타’는 ‘완결에 대한 거부’와 동의어로 취급되기에 문제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문보영의 시에 등장하는 ‘난쟁이’들은 “기둥 모양으로 쌓여 있”는 책기둥이 완성되고 의미작용을 시작하려는 순간에 “맨 아래 깔린 책”을 빼내며 책“기둥을 무너뜨”(<책기둥>(2017))리고, ‘에드몽’은 화자의 생각이 안일하다고 꾸짖습니다. 이로써 시는 완성되는 대신 스스로의 결함을 드러냅니다. 망가진 토르소가 됩니다.

지금 문제가 되는 바는 ‘몰입’입니다. 요컨대 만약 형식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 형식 속에서 만든 작품을 작위로 느끼지 않을 수 있다면, 화자의 목소리를 잡으러 오는 메타적 목소리는 필요하지 않습니다. 힙합에서 흔히 듣게 되는 내러티브. ‘나’는 유일하다는 내러티브는 폭탄 위의 시계만큼 식상합니다. 그러므로 그런 라인을 ‘말하는’ 순간 유일한 일이 아니게 됩니다. 여기에 아이러니가 있습니다. 실제로 내가 ‘유일’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발화로써 수행하면, 그 발화를 수행하는 ‘나’에 의해 그 문장이 즉각적으로 취소되는 겁니다. 자신이 그렇게 말하면서도 자신의 발화 내용에 대해 전적으로 신뢰해선 안 되는 그런 상투어입니다. 요컨대 주류 힙합의 문법에서 아이러니는 필연적입니다.

그러나 아이러니는 어떻게든 해소되게 되어있습니다. 편의를 위해 ‘아키텍쳐럴한 몰입’(우노 츠네히로)이라는 개념을 빌려오겠습니다. 힙합이 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 그러니까 ‘나’는 유일하다는 헛소리를 어떤 아이러니컬한 자의식 조작도 없이 찰떡같이 믿으며 수행하는 것은 《쇼미더머니》를 비롯한 쇼프로그램, 또는 장치 때문입니다. 단 한 사람만 살아남도록 설계된 배틀로얄이라는 장치를 통해 몰입을 지원하는 것이죠. 그 일련의 시퀀스들이 하나의 ‘내러티브’를 생산하고 이를 통해 참가자인 ‘나’는 자기 의미화에 성공합니다. 당연한 성공서사의 반복이지만 거기에 게임적인 조작들이 가미되면서, 또 실제로 사회적인 의미화 기제들이 작동하면서 그것은 ‘리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믿지 말고 보세요. 우승을 하면 보이는 것이 나오는데 믿을 필요가 없다는 겁니다.

이쯤에서 조금만 첨언하자면, ‘진짜’의 감각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은 ‘미적인 것’이기도 하고 동시에 ‘도덕적인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감각을 재분배, 교란하는 것이 때론 기존의 질서를 ‘어지럽히며’ 등장하기보다는 아주 동일한 것의 반복처럼, 모순을 봉합하면서 온다는 것이죠. 이전의 ‘희생’의 문법과 ‘숫자’의 문법을 봉합하기 위해 ‘야망’이라는 타협점을 동원한 더콰이엇과 슈퍼비의 사례에서도 확인되는 것처럼, 모순을 봉합하는 시끄러운 반복 속에서 우리의 감각은 은밀한 갱신을 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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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하신 힙합과 문학에 드러나는 ‘메타’라는 경향과 그 이후에 드러난 몰입의 문제에 대해 간단히 정리하자면; 장르적 관습을 의도적으로 비트는 ‘메타성’은 힙합과 문학에서 동시에 발견된다. 지금 시점에서의 ‘메타’는 장르적 관습으로부터 이탈함으로써 (관습적 의미에서의)완결성을 거부한다. 이제 문제가 되는 것은, 완결성의 거부에서부터 발생하는 ‘작위성’을 해소하기 위한 ‘몰입’이다. 장치 또는 게임적 조작에 의해 해소되는 작위성: ‘아키텍쳐럴한 몰입’. 여기서 첫 번째 질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90님은 《쇼미더머니》를 그 장치의 예로 들었는데,

Q1) 아키텍쳐럴한 몰입을 가능케 하는 장치로는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그러나 ‘작위성’을 대하는 양상이 단지 해소로서만 나타나는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를테면 2010년대의 시는 ‘작위성’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에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두 번째 질문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Q2) 작위성을 대하는 양상─몰입의 방식이 다양하다면, 또 어떤 것이 있을까요.

 

이쯤에서 ‘메타’라는 경향, 그중에서도 문학의 그것에 대해 첨언하고 싶습니다. 문학의 역사를 언술의 역사로 볼 때 모든 문학은 실질적으로 패러디입니다.(또한 이것은 힙합에도 어렵지 않게 적용될 것 같습니다)

이런 구분이 유의미한지에 대해선 의심스럽지만, 그럼에도 메타시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지도를 그리기 위해 계속하자면, 메타시는 크게 시론시와 패러디시로 나뉩니다. 먼저 시론시는 당연하게도 시의 역사와 함께 합니다. 언급하신 “김언이나 이수명의 메타”시를 시론시라 묶을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시론시는 쓰기 행위 그 자체에 대한 시, 즉, 시 쓰기의 시를 포함합니다. 오규원은 “내 앞에 안락의자가 있다 나는 이 안락의자의 시를 쓰고 있다”(「안락의자와 시」(1995))라고, 장정일은 “길안에 저녁이 가까워 왔다.라고 / 나는 썼다.”(「길안에서의 택시잡기」(1988))라고, 이준규는 “나는 앉아 있고. 나는 앉아서 이런 걸 쓰고 있고.”(「7」(2015))라고 썼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시쓰기의 시 역시, 시라는 장르 밖으로 걸어 나가려 한다는 점에서 시라는 ‘장르적 관습’을 겨냥하고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두 번째로 패러디시. 황인찬과 송승언을 위시하여 언급하신 메타시를 ‘패러디시’라 하겠습니다. 형식주의자의 말을 흉내 내자면 패러디시는, ‘인유를 주된 방식으로 하는 원텍스트의 전경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한국문학에서 패러디시라는 이름은 90년대에 본격적으로 자리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흔히 한국문학의 과도기라 불리는 90년대의 역사적 맥락을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90년대가 도래하기 이전, 거대 미학담론은 한국문학의 지배적인 동력으로 작동했습니다. 예컨대, 김현과 백낙청으로 대표되는 69년도의 리얼리즘-모더니즘 논쟁, 그리고 5공의 역사와 함께 서둘러 봉합되었던 87~89.3.의 민족문학 주체논쟁에 대해 우리는 떠올려볼 수 있습니다. 5공 이후, 한국문학은 시대적 요청을 상실합니다. 재현적⋅이데올로기적 시쓰기가 더 이상 요청되지 않는 시대. 그러므로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시대. 시는 더 이상 현실을 재현하지 않고, 시 그 자체로 현실을 형성하기 시작합니다. 여기서 직전의 문장들을 패러디시의 등장로를 열어준 ’시의성‘이라 할 때, “최근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메타’는 과거의 ‘메타’와는 판이”하다는 지적은 다음과 같이 수정될 필요가 있습니다. “최근 시인들의 시에서 드러나는 ‘메타’는 과거의 ‘메타’와는 판이”하지만, 90년대라는 이름의 과거와는 판이하지 않다. 이제 여기서 우리는,

Q3) 지금의 ‘시의성’이 90년대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

에 대해 좀 더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과 관련해서도 더 얘기해주셨으면 합니다.

(질문과는 별개로 한 마디 더 보태자면, 혹자는 ‘메타’라는 경향에 대해 회의적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약간은 편향적인 위치에서 이것을 미리 변호하자면, 우리는, 22년 전 혹자가 메타시에 대해 제출했던 진단─“단절된 자기회귀적 사고”, 자신의 역사를 “장작삼아 타오르는 시한부적인 불꽃”─이 결코 유효하지 않게 폐기되었다는 사실을, 그리고 차라리 “시 밖의 시는 없”다는 의미에서 “메타시 자체는 없는 것이”고, 단지 ‘시’가 있다는 지적이 꽤나 유효한 자리를 점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습니다.)

 

 

90

우선 “완결성의 거부에서부터 발생하는 작위성을 해소하기 위한, 몰입”이라는 요약에 개입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싶습니다. ‘몰입’에 장애를 겪는 것은 장르적 관습의 고도화(고착화)로 인한 것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메타’ 또는 완결에 대한 거부는 그 결과물이 되겠지요. 그러나 이 지네 게임과도 같은 ‘메타’를 정지시키는 것이 우리의 과업입니다. 마땅히 질문의 대상이자 심문의 대상이 되는 것은 ‘몰입’을 지원하는 방법들입니다. 다시 어리석어지는 방법입니다.

다시 ‘아키텍쳐럴한 몰입’을 위한 장치의 예를 들자면 ‘믹스테입’이라는 하나의 형식에 대해 지적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과거 작업물은 양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우선 정규앨범이라는 작업물은 적어도 일정한 수준을 유지하는 동시에 상업적 요구까지 만족시키는, 완전한 결과물이어야 했습니다. 그러한 상태에서 랩게임의 참가자인 ‘나’의 점수는 오로지 질에 의해, 입소문에 의해, 정성적 지표로 측정될 따름입니다. 그러나 믹스테입과 같은 유통구조가 새로이 확립되면서 래퍼에겐 새로운 스코어링 방법이 생겼습니다. 간단하게 쌓아올리는 작업물을 통해 래퍼들은 대중의 관심의 순환 속에 올라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엔 커뮤니케이션적인 즐거움이랄지 하는 것이 있다는 말이죠. 게임처럼 인지도가 쌓이고 인정이 누적되는 새로운 보상구조는 마찬가지로 중요한 하나의 장치(*미주3)입니다.

그러나 여전히 문제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의식 조작을 통해서도, 또 아키텍쳐의 지원에 의해서도 해결하지 못하는 아이러니스트들이 남아있으니까요. 멈블래퍼들은 여전히 장모음을 완전히 씹지 못하고 중얼거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가 불필요하게 복잡하네요. 정리해보면 이렇게 되겠습니다. 1) 2010년대 이후 우리는 형식에 ‘몰입’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2) ‘메타’라는 경향성은 그러한 몰입에의 어려움을 증거한다. 3) 이 ‘몰입’에의 어려움은 a) 자의식 조작에 의해, 또는 b) 구조적인 장치의 지원에 의해 부분적으로 해소되고 있었다. 4) 그러나 여전히, ‘몰입’하지 못하는 ‘속지 않는 자’들이 남아있다.

따라서 힙합에 있어서건 문학에 있어서건, 2010년대의 ‘발화’에 이중적 거리가 발생하는 것은 필연적입니다. 한편으로는 이 발화가 자신에게 귀속될 수 없음을 알고, 또 책임질 수 없음을 알기 때문에 발화자와 발화내용 사이의 간격이 벌어집니다. 그렇다고 발화의 내용과 그 언표에 들러붙은 욕망 자체가 주관적 수준에서까지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객관적 수준에서는 거짓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요. 이는 단순히 ‘쓰기’에 대한 자의식이 전면화 되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너무 어려운 이야기를 잘도 했네요. 이제 2010년대 후반의 우리에게로 시계를 다시 돌려놓읍시다.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이 부분입니다. 우리는 이 형식을 전적으로 신뢰하지 않고, 속지도 않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형식 속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습니다. 자의식을 컨트롤함으로써, 즉 허구를 알면서도, 속기로 해버린다면 그것을 ‘아이러니컬한 몰입’이라고 부릅시다. 그리고 어떤 장치들의 지원을 통해, 허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속임’을 당해버린다면 그것을 ‘아키텍쳐럴한 몰입’이라고 부릅시다. 이제 우리가 상대할 그것, 알고 있고, 속지도 않는 그것을 ‘아카이브적 몰입’이라고 부릅시다.

이 몰입엔 일단 형식에 대한 일차적 승인이 있습니다. ‘상징계’에 대한 일차적 승인이라고 불러도 무방합니다. 기존의 관습에 대한 승인이 ‘믿음’과는 어떤 관계도 없는 그런 사태.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정녕 분석해야 좋을 지점입니다.

이 ‘몰입’의 자아는 이제 한 사람의 기호항해자(semionauts)가 됨을 피할 수 없습니다. 니콜라 부리오가 ‘전유’라는 전략을 새롭게 읽어내는 기획과도 어쩔 수 없이 맞닿는 부분입니다. 특별히 문학의 편에서 말하자면, 정지돈이 누적된 문화적 관습/기억과 파편들로부터 떨어지지 않는 것도 여전히 이 문제에 속합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수퍼하이웨이라는

동일한 비참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제 정확히, 문제는 어디에서나 오는 빛입니다. 빛을 벗어나서 존재가능한 의미는 없고, 우리는 훤한 대낮인데도 여기저기를 더듬거리는 수밖에 없습니다.

다시 클라우드 랩의 느린 세례와 함께 중얼거리는 재키와이로 가자면 보다 분명해집니다. “그냥 즐겨 / 이 자본주의 위의 행복 / 난 몰라 너넨 지껄여 / 그 야매같은 문화개론”(<IZAKAYA>(2018)). 비판하는 대신 위에서 즐기고, 그러면서도 그 구조에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하는(본인이 즐기라고 해놓고 본인은 즐기지 않는) 이 아이러니가, 이 위태로운 메타가 본격적인 문제입니다.

인내심을 갖고, 46님은 질문의 형식을 통해 간접적인 방식으로만 목소리를 내주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우리가 마지막으로 마주한 질문, ‘아카이브적인 몰입’에 대해서는 46님께서 개입해주시길 바라고 있습니다.

저는 종종 김승일의 시에 김행숙 피규어가 등장한다고 생각하는데. 그리고 송승언의 시나 황인찬의 시에 이수명의 고양이들이 아직도 난장판을 시작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렇다면 이 이어달리기는 어떤 의미에서 재밌는 걸까요? 저는 너무 동시대로 가는 일을 의도적으로 경계했습니다. 이렇게 피한다고 한들 동시대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면 이제 직접 물을 때가 된 것 같습니다. 우리가 여전히 지루한 지구라트를 뒤지며 썩은 혓바닥을 궁금해 한다면, 우리가 궁금한 매장(賣場)은 무엇일까요? 이 밝은 무덤에서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나요? 우리가 동시대의 공동체라면 인류학적 공동식사(communal meal)는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나요? 복도의 낮은 파도가 우리의 발목을 적시고 있는데 우리는 왜 여전히 차오르지 않나요? 공원이 소진될 때까지 반복되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나요? 동시대의 입장에서, ‘아카이브적인 몰입’은 어떤 쓸모를 가질 수 있을까요?

 

 

46

제 목소리가 얼마나 유효할진 모르겠지만, 그럼에도 ‘아카이브적인 몰입’에 대해 말해보자면, 우선 문학이라는 트랙을 달리는 10년대의 주자(시적 자아)에 대한 묘사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제가 봤을 때 이들은 마치 ‘비자아를 탐하는 만족할 줄 모르는 자아’처럼 보입니다. 여기서의 비자아를 자신만의 주법으로 트랙을 달렸던 과거의 주자라 했을 때, 그 선입견‘들’의 총체를 아카이브라 할 수 있겠습니다. 극복과 결별의 대상이던 아카이브는, 과격하게 말하자면, 이제 단지 ‘마음대로’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일 따름입니다. 비약을 줄이기 위해 더 이야기 해보겠습니다. 우리는 10년대에 이르러 트랙에 대한 주자의 ‘소박한 애증’을 목도하게 됩니다. 비자아는 더 이상 과거처럼 폐기를 전제하지 않습니다. 10년대의 주자는 비자아를 채택하고(A를 채택하는 것은 A에 대한 사랑을 증거합니다) 그것과 비밀스런 동거를 시작합니다. 함부로 누설하자면, 대표적으로, 김승일은 김행숙(<초록>(2012):<친구들>(2003))과, 황인찬은 김수영(<멍하면 멍>(2015):<절망>(1974)), 진은영(<머리와 어깨>(2015):<그 머나먼>(2010))과, 안미옥은 김언(<시집>(2017):<감옥>(2009))과 동거합니다. “고양이를 따라 / 고양이를 소비”하는 “고양이를 관람하는 고양이들”(이수명, <고양이 비디오를 보는 고양이>(2004)).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채택이 변용이라는 부분적 취소를 동반한 채택이라는 것입니다. 채택된 것들이 그 자체로 암시하고 있는 불가능성을 상기했을 때, 변용이라는 모습의 개입은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비유적으로, ‘변용’은 죽은 것(비자아)을 트랙 위에 소환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경유해야하는 하나의 ‘소생작업’입니다. 여기서 재미있는 지점은, 죽은 것을 확인하고 그것을 소생시키는 과정 사이에 ‘죽음의 (재)확인’이 자리한다는 겁니다. 이것은 폐기된 비자아를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90님의 말대로 이것을 ‘공동식사’에 비유하자면, 10년대의 트랙은 눈부신 제의적 공간─카니발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다시, ‘아카이브적인 몰입’의 작동과정을 그려내기 위해 반복하자면, 비자아가 쌓아올린 선입견의 책기둥, 그 ‘법전’들을 10년대의 주자는 거침없이 개정합니다. 10년대의 주자는 스스로 트랙의 입법자가 되기에 이릅니다. 이제 법이 어떻든 더는 상관이 없고, 그러므로 초자아는 쉽게 폐기됩니다. 어쩌면 10년대의 주자는 ‘법’을 더는 ‘법’의 자리에 놓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적절할지 모릅니다. 이러한 태도의 변화에 따라, 아카이브는 언제나 마음껏 갖고 놀 수 있는 장난감 바구니로, 또, 변경가능한 사소한 놀이의 규칙으로 격하됩니다. 법의 자리가 비어있는 이 트랙 위에서 단지 장난감을 갖고 노는 그들을 막을 수 있는 ‘누군가’는 없습니다. 그리고 ‘누군가’가 없기에, 이 놀이의 진정성에 대한 의심이 개입할 수 있는 여지 또한 없게 됩니다. 몰입은 여기서 자연스레 발생합니다.(*미주4)

여기까지 왔을 때 저는, 입법자로서의 10년대 주자를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한 주자로 묘사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사안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습니다. 그들의 채택이 변용이라는 과정을 통해 일그러졌다한들, 그것이 여전히 ‘채택’이라는 사실엔 변함이 없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10년대 자아는 이 일그러진 채택의 과정 속에서 비자아의 패배(죽음)를 필연적으로 인정(수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이어달리기는 트랙 위에 발현된 타나토스적 욕망이기도 합니다. 이제, 10년대의 주자에 대해 보다 정확히 말할 수 있겠습니다. 10년대의 자아는 무소불위의 권력적 자아가 아니라, 트랙을 유지하기 위해 기꺼이 코마상태에 빠진 무력한 자아이고, 패배의 트랙 위에서 놀이할 수밖에 없는 무기력한 자아입니다.

이상의 주장을 취합했을 때, 이 ‘언데드 이어달리기’는 포스트모던적 극복과 결별의 방식이라기보단, 포스트모던적 ‘생존의 방식’에 가까워 보입니다. 더 이상 새로운 골인지점을 만드는 것이 유효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나 자신의 역사이자 ‘놀이방’인 트랙의 장례식을 서둘러 치를 수는 없기 때문에 찾아낸 달리기의 방식. 우리는 이제 굳건해보이던 트랙의 일그러짐을 목도하게 됩니다. 이 일그러짐은, ‘꿈’의 위치를 점하는(혹은 점했던) 비자아, 즉, ‘빛’을 채택의 돋보기를 통해 국소적으로 소환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왜곡입니다. 너무 밝은 메타모프(metamorph) 트랙.

동시대인으로서의 우리는 이 “피할 수 없”는 눈부심 속에 서 있습니다. 지면에 싣지 못하게 된 90님의 말처럼 “따라서 문제는 빛입니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과업은, 지금 쏟아지고 있는 ‘빛’과 ‘빛에 가려진 것’을 똑바로 쳐다보기 위한, 질문이라는 형식의 선글라스를 만들고 그것의 성능을 부단히 연구하는 일일지 모릅니다.(이러한 과정을 경유함으로써만 우리는 마침내 아감벤이 지적한 ‘동시대인’의 자격으로 트랙 위에 떳떳이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야 트랙은 비로소 ‘빛 이후’를 예감하고, ‘빛 이후’의 새로운 주자를 환대할 준비를 마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 인터뷰의 온점을 물음표의 모습으로 찍고 싶습니다. 이 ‘언데드 이어달리기’의 카니발이 이제 시작이라면, 이것은 언제까지 반복될 수 있을까요? 이 ‘언데드 이어달리기’가 진행되는 트랙 위에서 10년대 주자는 어느 곳에 자신의 자리를 마련하는 걸까요? 지금의 트랙에서 시체 썩은 내가 진동한다면, 이것은 어째서 아름답게 느껴지는 걸까요? 이 불가능의 트랙은 왜 기어코 가능해지려 하는 것일까요?

 

미주

* 1

진정성, 핍진성, 더 나아가 문학성이 언제나 역사적 범주라는 것은 별도의 논의가 필요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당시에야 어쨌건 지금은 뤼미에르를 보고 ‘진짜로’ 바지를 적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한때 진정하다고 느끼고, 귀하다고 느끼는 방법들은 모두 물음에 부쳐졌습니다. 만약 ‘실재계’에 복무하는 것조차 바람직할 수 없다면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이에 대한 응답으로 최근 ‘윤리적 올바름’이 미학적 규범을 대체하고 있다면, 그것은 차라리 미학적 규범 상실로 인한 증상입니다. – 90

*2

요약하자면 이렇습니다. ‘스팸 이미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힙합이라는 분열된(splitted) 주체의 효과로서의 소외와 그것의 유출에 대해. 아 잠깐! 우리가 지금까지 다룬 얘기가 그 얘기군요; 진정성, “돈다발이 찢긴 자리에서 두 개의 위폐가 경쟁하고 있는 형국”.

*3

물론 이러한 몰입구조가 새로운 ‘진정성’의 결정적 원인이라는 단순한 결정론은 아닙니다. -90

*4

이제 이 트랙 위에서 ‘강력적인 미학적 교리’는 제출될 수도, 성립할 수도 없습니다. 이 변화된 트랙 위에서 발생하는 아쉬움은 직전의 문장에서 발생하는 멜랑콜리와 관련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종언 아닌 종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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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가 와도 시체처럼”에 대한 답글 1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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